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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신라 말 조선 말 현상

  • 입력 2021-09-12 05:58:00
  • 이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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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핀포인트뉴스 이정선 기자]

신라 말, ‘금입택(金入宅)’이라는 ‘초호화주택’이 있었다. ‘진골(眞骨) 김씨(金氏)’의 호화주택을 일컫는 것이라고 했다. 금박을 입힌 주택, 이를테면 ‘금테 두른 집’이었다. 그런 주택이 39채라고 했다.

‘서남해안’에 있는 섬은 통째로 유흥장이 되었다. ‘가진 자’들은 그 섬에서 활을 쏘며 사냥놀이를 했다.
반면, ‘없는 자’들의 생활은 끔찍했다. 자식을 밥과 바꿔먹는 백성은 그 숫자를 파악하기조차 힘들었다.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배를 타고 떠도는 백성도 적지 않았다.

헌덕왕 때에는 당나라 절동(浙東)에서 구걸하는 신라 사람이 170명이었다. 굶주린 신라 유민 300명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조선 말에도 다르지 않았다. ‘태중귀인(胎中貴人)’이라는 ‘갑부’가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갑부였다.

황현(黃玹·1855∼1910)은 ‘매천야록’에 이렇게 적고 있다.

“병조판서의 아들 조성하(趙成夏)는 어렸을 때부터 기름진 고기와 쌀밥만 먹고 자랐다. 하루에 6번씩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 ‘나는 평생 밥맛을 모른다’고 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맛이 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조성하는 잉태해 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하루도 부귀를 누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태중귀인’이라고 했다.”

‘매천야록’은 ‘땅 부자’ 이유원(李裕元)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유원은 서울에서 80리 떨어진 양주(楊州)에 별장을 두고 있었다. 그 80리를 왕래하는 길이 모두 그의 ‘밭두렁’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땅은 단 한 평도 밟지 않고 다녔다고 했다.

반면, 가난한 농민은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비싼 임대료를 물며 ‘땅 부자’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거나, 그 밑에 들어가서 노비로 살아야 했다.

가진 게 없으니 재해가 닥치면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1809년 극심한 가뭄이 나라를 휩쓸었다. 그 바람에 알량한 농사마저 망치고 말았다. 이듬해가 되자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나라에서 경기도와 삼남지방의 기민(飢民) 숫자를 조사했더니 무려 839만 명에 달했다. ‘조선 8도’의 전체 인구 758만 명을 상회하는 희한한(?) 통계였다.

이른바 ‘재난지원금 계급표’라는 게 온라인에서 떠돈다고 해서 돌이켜보는 ‘과거사’다. 재난지원금 지급 여부에 따라 국민을 성골과 진골, 육두품, 평민, 노비 등으로 구분하는 ‘현대판 골품제’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재난지원금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지급 대상을 소득 하위 88%에서 90% 수준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평민이나 노비의 숫자가 순식간에 2%포인트나 불어나는 셈이다.

이정선 기자 bellykim@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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